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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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세계

6월 항쟁 32주년

슬픔에 관한 것 2019. 6. 10. 12:19

올해로 유월항쟁 또는 민주항쟁 32주년을 맞이한다. 어디선가 열리겠지. 그날과 사뭇 다른 오늘.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32년이면 강산이 여러번 바뀐,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린 세월!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1987년 6월 10일 그날은?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세력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살인마, 살인, 쿠데타 정권이라며 정통성을 부정하고 퇴진투쟁을 벌인다. 급기야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해 국면전환을 꾀하게 된다. 전국의 청년학생과 야당 등은 반발하며 전국적인 운동본부를 구성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6월 10일은 전국동시다발투쟁을 앞두고 9일 이한열이 폭력정권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다. 분노한 사람들이 10일 국민총궐기('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전국에서 독재타도의 함성을 더 높이게 된다. 서울 명동성당,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전국 곳곳에 투쟁은 확산되었다. 중소규모의 도시에서도 투쟁이 열릴 정도로 반독재-대통령 직선, 민주화 열망은 고무되었다.

우리 역사상 6.10 아마도 가장 많이 최루탄을 사용한 날일 것이다(?) 이게 그 당시 회자된 것 같다. 그 당시 대학가는 오전 집회(출정식)-정문투쟁-오후 시내 중심지 가투로 이어졌다. 수업? 그게 될리가 있나. 온통 최루탄 범벅인데 도서관에 있는 것은 수치였다. 대부분 투쟁대열에 , 가투에 뛰었다. 그게 유월이다. 1987년 대학가는 아직 전대협이 만들어지기 전이다. 총학생회가 있었고 언더써클과 자민투, 민민투, 삼민투 등이 있었다. 이런 명의로 투쟁이 진행되었고 민주화를 바라는 학생일동 등등 투쟁참가는 별다른 구분이 없었다.

대자보, 무석무탄 무탄무석, 백골단(사복체포조), 사과탄, 전투경찰, 가투, 동맹휴업, 넥타이부대, 좌경용공, 불순분자, 핸드마이크, 등사기 등. 당시는 집회신고 제도가 없었다. 무조건 불법집회였고 모이는 구호 외치고 돌 덙고 최루탄 쏘면 흩어져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숨고 도망치고 무장해제 시키고, 도로와 시장골목 할 것 없이 몰려다녔다. 저녁이면 술 먹고 소주병 모아서 화염병 만들고 다음날 던지고!

1987년 6월은 그랬다. 87년 체제 어쩌구 저짜구 하는데 아직 우리의 투쟁은 진행중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완성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분명 진전된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정치적 역량이나 공간의 확장은 유의미한 측면이나 이는 형식적이고 실질적 민주주의는 아직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