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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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슬픔에 관한 것 2017. 9. 10. 18:58


살인의 핏빛이라곤 생각되지 않을만큼 책표지의 색은 곱기만하다.

소설 내내 흐르는 말, 되새김 되는 "무서운 건 악이 아니요.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 문장이다. 무섭고도 잔인한 말. 살인이 잔인한 것처럼.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시간, 살인자로 살아온 시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어느 한 지점에 머문 시간이란 없고, 정지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까. 시간은 용서의 의미가 아니다.

'살인자' 뭘 기억하고픈가?
사람을 살해 또는 죽이는 사람. 어린시절 아버지를 살해한 김병수는 한평생 그 기억에서 멋어나지 못한다. 마땅히 죽여야 라는 쓰레기를 처리하듯 살인을 저지른다. 하나, 둘씩 점차 연쇄살인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현실은 어떨까?
나이 일흔의 김병수, 딸 은희, 박주태? 소설에 나오는 주요 인물이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차즘 상실해가는 살인자 김병수. 모든 게 김병수의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은희는 딸로, 박주태는 은희와 결혼할 살인마로 그려진다. 김병수는 은희를 딸로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알츠하이머가 아니더라도 희미해지거나 오류를 들어낸다. 자기자신부터 기억의 상실로 인해 진실이 헷갈린다. 시간과 기억은 서로를 배반한다. 복수의 시작은 은희 엄마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나고 뇌수술을 박은 후부터라니, 묘하다.

그래서, 반전이 이루어진다. 기억의 배반이다. 기억은 곧 시간이라는 본질과 범위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은희는 김병수의 딸이 아니고, 그토록 지켜주고픈 은희는 결국 김병수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은희는 김병수는 돌봐온 사회복지사이고, 은희를 졸졸 따라다니며 희대의 살인마로 알았던 박주태는 은희의 애인도 아닌, 살인범을 쫒는 경찰이다. 알츠하이머 이전의 기억은 사실이나, 나머지 기억은 김병수의 잘못된 기억일 뿐.

알츠하이머 환자인 김병수의 기억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김병수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은 의미없는, 단지 본능에 의한 것, 살인마의 잔혹행위에 불과하다. '살인의 추억'은 없다. 기억은 망상이고 착각이다.

권력자들은 흔히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고 한다. 발뺌하고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이다. 기억의 소멸, 잘 모른다고 해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도, 그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나 가해자의 기억은 그렇다. 가해자의 기억은 부정확하며 때론 틀리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와 일치시켜 볼때 더 그럴 것이다. 기억이란 원래 믿을 것이 못된다.

사람마다 기억하기 싫은, 잊혀버리고 싶은 것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기억과 시간은 무책임한 관계다.

기억의 반대는 잊혀지는 거. 스스로 잊혀야 하나 그렇지 못한 반드시 기억해야, 기록해야 할 게 있다. 잊혀질 권리가 있는 반면, 그 반대 역시 존재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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